異山

김수영의 <飜譯者의 고독>

海松 2010. 7. 23. 03:12

어떤 글을 읽든 대개의 경우 자기 문제와 관련된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지 않나 싶다. 아래에서 일부 발췌했던 김수영의 잡문에서는 애의 학교성적, 애와 애비의 관계가 그런 대목이겠지. 어쩌면 종연이는 처제 대목까지 눈에 들어왔을 것이고, 돈벌이 못하는 내 경우는 애의 과외공부선생 짓을 함으로써 “5천원벌이”를 한다고 얼씨구나 하는 대목이 추가로 눈에 들어오더구먼. 지금 내가 그와 비슷한 짓을 하고 있으니 더 그렇겠지.

이번에 읽은 <飜譯者의 고독>이라는 짧은 글에서는, 밥벌이로 번역을 하는 처지에 ‘연대감’을 느꼈다고 할까. 그가 토로하고 있는 문제들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전혀 달라지지 않은 데 대한 낙담도 있고.

‘白手’--이 점에서도 연대감을!--였던 김수영이 ‘돈 안 되는’ 詩만으로는 먹고 살 수가 없어 養鷄---나는 ‘가사노동’---를 한 것이나 “부업으로” 번역을 한 건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

한번은 Who's Who를 [누구의 누구]라고 잘못 번역했는데, 이 책이 모 대학의 교재로 사용된 모양. 그 소식을 듣고 김수영은 담당선생한테 부랴부랴 변명의 편지까지 띄운 일이 있었다네. 그러면서 하는 말.

“그 책이 재판이 되었는데도 출판사에서 정정을 하지 않은 모양이다. 아무리 너절한 번역사이지만 재판이 나오게 되면 사전에 재판이 나온다고 한마디쯤 알려주었으면 아무리 게으른 나의 성품에라도 그런 정도의 창피한 오역을 고칠 수 있었을 터인데 우리나라 출판사는 그만한 여유조차 없는 모양이다.”

나도 지금까지 몇 권의 책을 번역했고 그 가운데 몇 권은 재판이 나왔지만, 그 사실을 출판사로부터 미리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 “너절한” 출판사들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계속 그런 일을 겪다보니 안 되겠다 싶어 한 출판사와는 2쇄, 3쇄 때는 단어와 문구 수정, 3쇄 이상 나가면 개정판을 낼 것을 사전에 약속했지만, 그 후 그 출판사로부터는 감감무소식. 그런데 최근 서점에서 책을 보니 내가 알라딘 독자 리뷰에 誤字이니 고쳐 읽어달라고 밝힌 단어가 바로잡혀 있더구먼. 그런데 책 마지막 면에는 여전히 1쇄라고 적혀 있고. 그 출판사는 재판을 찍어도 재판이라는 표시조차 하지 않는 모양. 저작권료도 일괄 지급했고 번역료도 매절로 했기 때문에 2쇄라고 밝혀도 돈이 더 나갈 일은 없을 터인데, 참 이해할 수 없는 곳이구나 싶더만. 번역자가 나서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번역이 되도록 고쳐나가겠다는데도 마다하는 출판사들이라니. 많이 고치겠다는 것도 아니고 단어 몇 개 고치겠다는데도 말이다. 그래도 요즘은 인터넷 공간이 있으니, 출판사가 협조하지 않으면 그곳을 활용할 수도 있겠지. 안 그러면 나도 다음과 같은 지경이 될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얼마전까지는 내딴에는 열심히 일을 해주었다. ...... 나의 재산은 정성뿐이었다. 남보다 일이 더디고 남보다 아는 것은 없지만 나에게는 정성만은 있다고 자부해왔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는 그 자부마저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전에는 원고를 다 쓰고 난 뒤에 반드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읽고 또 읽고 했다. 그러던 것이 요즈음에는 붓만 떼면 그만이다. ...... 이런 버릇은 번역일에만 한한 것이 아니다. 모든 원고가 다 그렇다. 틀려도 그만 안 틀려도 그만 잘돼도 그만 잘못돼도 그만이다. 아니, 오히려 틀리기를 바라고 잘못되기를 바라고 싶은 마음인지도 모른다.”

“평소부터 소설가라기보다는 학교교사로 보고 있었”다는 “모소설가”라면 이런 태도에 대해 ‘그렇게 자포자기가 돼서야 쓰나. 아무리 보수가 적은 번역일이라도 끝까지 정성을 잃지 말아야지’라고 말할 거라면서 김수영이 하는 말, “우리나라에는 이런 고급<속물>이 참 많다.” 이게 이 짧은 글의 마지막 문장이다. 번역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것도 이 말을 하고 싶어서였을까. 글의 제목인 “飜譯者의 고독”은 “너절한” 출판사들과 “고급<속물>”들 사이에 끼어있는 번역자의 실존 양상을 가리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