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

번스타인, 하버마스 그리고 칸트?

차라투스 2012. 2. 8. 03:40

김PD님이 이모 PD의 칼럼을 소개하셨죠. 그에 대한 제 입장은 이미 댓글에 밝혔고요.

이PD 칼럼 이전에 여러 사람들에 의해 글이 쓰여졌는데, 소모적인 논쟁에서 벗어나, 예술가의 정체성에 대해 논의한 장정일글을 옮기도록 하죠. 그에 대비하는 의미에서, 이택광이 예전에 블로그에 올렸던 글도 함께 올립니다.

간략하게 보자면,

고전음악 애호가로 알려진 장정일은 예술인이 올바른 정치성을 가지길 강조합니다. 이에 대한 음악인의 반응은? 동의 여부를 떠나서, 물론, 담담하게 받아들이죠. 김모씨 글에 대해 짜증을 내거나  이모 PD의 글에 실망하는 것과는 다른 반응이죠. 장정일의 글에는 불순한 의도(?)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인 것 같네요. 제 경우에도 장정일 식의 글은 대환영입니다.

이택광의 글은 음악과 관련된 것은 아닌, '공인'의 의미에 대해 짚어본 글입니다. 일견, 장정일과 대비대는 몇가지가 논점이 포착되므로 함께 읽으면 무척 흥미로우리라 싶네요. 그리고 "우리의 칸트"가 등장하는 터라, 식충이가 뭣 좀 덧붙여 설명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고요. ^^


번스타인과 정명훈, 그 정치적 차이  
                                   -
장정일 (시사인, 12년 1월 14일)

자주 가는 도서관에서 배리 셀즈의 <레너드 번스타인>(심산출판사 펴냄, 2010년)을 발견했다. 레너드 번스타인이라면 잘 모를 독자도 있겠지만,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만큼 유명한 지휘자다. 특히 그가 1960년대에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전곡을 최초 녹음하면서 일으킨 ‘말러 붐’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2005년에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이 된 정명훈이 2010년부터 열성을 기울인 것도 ‘말러 사이클’이다.

1918년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나 1990년에 타계한 번스타인은 미국이 낳은 20세기의 ‘문화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하버드 대학에서 음악 이론과 철학을 전공하고 커티스 음악원에서 지휘를 공부한 그는, 스물다섯 살이던 1943년부터 지휘와 작곡에서 명성을 쌓았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소 냉전이 시작되던 1950년대 초반에 그는 미국 내의 어떤 오케스트라도 지휘하지 못했을뿐더러, 해외 활동에 필요한 여권까지 취소됐다. 정치학자인 지은이는 번스타인 사후에 비밀 해제된 FBI의 ‘번스타인 파일’을 바탕으로, 그의 경력에서 공백 처리된 몇 년간의 수수께끼를 풀었다.

번스타인이 대학생이던 1930년대 중반은 미국에서는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이 실시되었고,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 체제가 기틀을 잡아가던 때였다. 이런 국내외 정세는 미국 내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을 진보운동에 가세하게 했고, 사회주의나 공산당도 기지개를 켰다. 예술계의 사정도 다르지 않아서 자본주의 문명과 미국 사회의 치부를 폭로하는 온갖 장르의 작품이 이 시기에 쏟아졌다. 번스타인은 재즈·가스펠 같은 미국 민중의 음악적 자산과 노동자 계급을 한데 묶을 수 있는 음악 이론 작업을 하면서 창작에 열중했다.

비밀 해제된 문서를 보면, 번스타인은 좌파 예술단체와 정치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대학 시절부터 FBI의 감시를 받았다. 최초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하버드 대학에 자생하는 ‘빨갱이 집단의 실질적 지도자’였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그의 성공을 막지는 못했다. 그때는 미국의 우파 세력이 ‘빨갱이’로 경원시했던 루스벨트가 대통령이었던 데다가, 파시즘과의 일전이 확실한 상황에서 소련은 미국의 중요한 우군이었다. FBI가 작성한 ‘빨갱이 리스트’가 괴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부터다. 소련의 핵실험 성공(1949년)과 중국의 공산화(1949년)에 연이은 한국전쟁(1950년)이 매카시즘과 연결되면서, ‘빨갱이 사냥’이 불붙었다.

1950년대에 벌어진 빨갱이 사냥을 매카시 개인의 ‘빨갱이 공포증’에 전가하는 것은 한참 모자란 해석이다. 미국 우파와 공화당은 루스벨트의 뉴딜적 요소를 뿌리째 뽑기 위해 매카시와 하원의 반미활동조사위원회를 이용했다. 미국 유수의 CBS방송과 <라이프>지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번스타인은 반미활동조사위원회의 소환 앞에 전전긍긍했다. 그는 여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감옥에 보낸다는 위협 앞에서 친구들을 팔지 않을 용기’와 ‘증언대에 서게 될 때 옳다고 믿는 일을 할 용기’를 갖기 소망했다. 다행히도 그는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 출두하는 대신 서면으로 “본인은 공산주의가 아닐뿐더러 결코 공산주의를 추종하지 않았으며, 의심이 가는 조직과 혹시 관계가 있다면 단지 ‘별 의미 없는’ 접촉이었고, 그들의 진의를 모르는 상태에서 생각 없이 접촉했을 뿐”이라는 진술서를 쓴 뒤 요주의 인물에서 놓여났다.

여러 종의 번스타인 전기는 그가 ‘속아 넘어간 공산주의자’이며, 그의 정치 참여를 젊은 시절의 치기로 기술한다. 하지만 번스타인은 반미활동조사위원회의 압박을 받고 지휘봉과 여권을 빼앗긴 몇 년간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정치 활동을 중단한 적이 없었다. 그는 1964년 흑인 민권운동의 기폭제가 된 셀마 대행진에 참여했고,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에 줄곧 힘을 실었다. 또 유대인임에도 이스라엘이 웨스트뱅크에서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자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생존권을 위해 청원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세이무어 마틴 립셋의 <미국 예외주의>(후마니타스 펴냄, 2006년)가 저절로 떠오른다. 저 책에서 우파 정치학자인 지은이는 짐짓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는가?”라는 질문을 내놓고, 거기에 대한 해명을 시도했다. 결론은 평등하고 계층 상승의 기회가 자유로운 사회와 경쟁적인 양당 구도가 미국에서 사회주의의 설 자리를 없앴다는 것이다(양당은 표를 얻기 위해 진보의 의제를 가로챈다). 반면 이 책은 번스타인이 오페라로 만들려고 했던 ‘사코·반제티 사건’과 같은 사회주의에 대한 철저한 탄압이야말로 미국 예외주의의 숨은 원리라고 폭로한다.

‘한 미국 음악가의 정치적 삶’이라는 원저의 부제가 번역본에서는 ‘정치와 음악 사이에서 길을 잃다’로 둔갑했는데, 번스타인은 결코 그 사이에서 길을 잃은 적이 없다. 그가 작곡을 하기 시작한 1930년대, 그 앞에는 쇤베르크 유의 아방가르드(무조음악)와 스트라빈스키 유의 신고전주의라는 두 갈래 길이 놓여 있었다. 정치적 진보주의자였던 그는 의외로 당대의 미학적 진보였던 무조(無調)음악을 비판하면서, 미국 음악의 모태인 흑인음악(재즈)을 이용해서 미국의 국민음악을 만드는 길을 선택했다. 여기에 대해 지은이는, 그의 음악적 보수주의는 정치적 진보주의와 함께 간 것이었다고 강조한다. 번스타인은 조성음악이 ‘윤리적 도시국가’를 구현하는 수단이라고 간주하면서, 진보에 대한 여하한 희망을 포기한 사람들이나 무조음악을 옹호한다고 비난했다.

서울시향 예술감독직 재계약을 앞두고 ‘과다 급여’ 논란에 휩싸인 정명훈은, 심경을 묻는 기자에게 “나는 신문을 안 본다. 아침에 일어나 악보를 보고, 집에서 나와 연습을 하고, 다시 집에 가서 요리하는 사람이다”라고 대답했다. 그의 답변은, 우연히도 1950년대의 미국을 묘사한 <레너드 번스타인>의 한 대목을 사무치게 만든다. “정치는 고위층의 전유물”이고, “질서 유지는 공공기관의 검열, 비밀경찰, 그리고 범법자를 서슴없이 장기형에 처하는 사법부의 몫”이며, “새로운 중산층 계급은 이념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없는 건전한 유흥을 즐기며 가족과 생계, 그리고 개인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만들어줄 상품을 소비”한다. 이런 세계에서 우리는 차츰 축생(畜生)이 되고, 자나 깨나 정명훈처럼 살고 싶어진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 이택광 (개인블로그 09.10.13)

87년 이후 한국으로 유입된 '시민사회론'의 영향 때문인지, 한국에서 '공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대체로 하버마스의 뉘앙스를 많이 풍긴다. 그래서 항상 한국에서 중요한 것은 '공공적 합의'라는 말이지만, 도대체 이게 한국사회에서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는지에 대한 성찰은 없다. 최근 들어 이른바 애국주의를 옹호하고 있는 일부 진보계열 학자들의 논리에서 드러나는 허점이 바로 이것이다. 이들에게 '애국'이라는 것은 '공공적 합의'와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합의가 얼마나 폭력적인 현실을 은폐할 수 있는지를 고찰하지 않는다. 이번 김현진 사건을 둘러싼 논의에서도 이런 담론의 현상들을 발견할 수 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나누는 기준으로 '국가'와 '개인'을 적용하는 경향이 농후한 것이다.

연예인이나 명사를 '공인'이라고 부르고 이들에게 일반인보다 더 강한 도덕성을 강요하는 분위기는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속류화한 하버마스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애먼 하버마스가 엉뚱한 곳에 와서 고생한다는 느낌이다. 나는 이런 결과의 책임을 가라타니 고진처럼 하버마스의 이론 자체에 내재한 결함에서 찾을 생각은 없다. 하버마스를 면밀하게 읽어보면, 그가 말하는 의사소통의 공간이라는 건 '이상적인 것'이지 결코 실현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런 문제를 떠나서, 이번 논의를 계기로 무반성적으로 '공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습속에 대해 한번쯤 문제제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론적으로 본다면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은 유토피아적인 것이지만, 실제로 이것을 사회분석에 적용했을 때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말하자면, 공공적 합의를 이루는 그 주체들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했을 때, 하버마스주의자들은 아마 '시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들은 이 시민을 보편적인 것이라고 말하겠지만, 실제로 현실에서 본다면 이 시민은 분명히 제한적인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지적처럼, 그 합의를 이루는 공동체 바깥을 배제시킬 가능성이 늘상 이 시민이라는 용법에 잠재해 있다. 실제로 하버마스는 유고내전 기간 동안 코소보에 대한 공습을 공공적 합의라는 명목으로 지지함으로써 이런 문제점을 스스로 노출시켰다.

지금 일부 진지한 이들조차도 인터넷상에서 특정 개인에 대해 가하는 다구리를 '공공적 합의'라고 착각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래서 내가 칸트를 끌고 들어온 것이다. 칸트에게 중요한 것은 국가라는 영역 내에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지 아니면 사적으로 사용하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김현진이 작가로서 하는 행동과 실제로 드러난 행동이 달랐다는 사실을 다구리의 정당성으로 들이미는 이들이 있지만, 이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칸트의 정의에 따르면, '작가'는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현실에서 공무원이거나 정치가이거나 회사원이거나 하는 문제를 넘어선다. 작가로서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상정하고 글을 쓰는 순간 그는 공적으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다. 칸트의 말대로 자신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항상 자유로운 행위이다. 말하자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고, 누구나 그것을 출판해서 독자들에게 내놓을 수 있다. 이런 사용은 제한 받지 않는다.

하지만 이성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 공민이나 공직에 임하는 이들(정확하게 말해서 권력을 갖는 이들)은 엄격한 제한을 받는 것이 타당하다. 이들이 이성의 사적 사용을 남용한다면 "계몽의 진보"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성의 사적 사용은 공민이나 공직이라는 그 제한적 지위 내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칸트의 정의에 따르면, 작가의 행위가 공적인 것은 맞지만, 그 때문에 '이성의 사용'을 제한 받아야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성의 사용을 제한받아야할 이들은 작가에게 '도덕적 순결성'을 강요하는 인터넷 공민들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현실의 작가가 어떠하다고 해서, 그의 글이 가치 없다거나 날조라고 주장하는 건 인류가 계몽 이후에 쌓아온 기본적인 문화적 소양 자체를 부정하는 망동에 지나지 않는 일이다. 이런 이들에게 카라바조 같은 살인자 화가나 장 주네 같은 도둑 시인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일은 정말 멸치를 고래라고 설득시키는 일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이게 한국 사회에 만연한 인터넷 문화의 수준이고, 고등교육을 통과했다고 자부하는 '헛똑똑이들'의 실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