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메르
앞선 글에서 카라바조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의 사상과 기법을 추종한 이들을 카라바지스트 (Caraviggist)라고 칭하며, 요하네스 얀 베르메르 (Johannes Jan Vermeer 1632~1675)를 대표적인 카라바지스트 중의 한명으로 언급한 바 있습니다. 베르메르의 대표작 몇개만 보도록 하죠.
베르메르는 17세기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풍속화가입니다. 앞서 설명드린대로 카라바조와 램브란트의 뒤를 잇는 '빛'을 활용한 기법이 높게 평가받는 화가입니다. [음악 수업]이라는 아래의 작품은 74 X 64.5cm의 소품인데요. 좌측에서 따뜻한 빛이 스며들어 방 전체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느낌이 참 좋습니다.
참 따뜻하고 세밀하게 그려졌다고 느껴지기는 하지만, 뭔가 의미를 담고 있다거나 혹은 기법상을 뛰어난 무언가를 보여주는 그런 것은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죠? 네덜란드 무역이 활성화되어 소위 말하는 황금기를 누리던 당시의 시민적인 풍요로움을 보여주는 풍속화이기 때문이란 생각이 드네요.
아쉬운 점은, 현재 확인되는 베르메르의 작품은 겨우 35점 정도에 불과하다네요. 그 중에서 아마도 가장 많이 알려진 그림은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Girl with a pearl earring)]일 겁니다. 동명의 소설로도 출간되었고 영화로도 제작되었죠.
사이판에 근무할 때 비디오를 통해 그 영화를 봤는데요, 참 흥미로웠습니다. 튜브 물감이 없던 시절인지라 물감을을 직접 만들기 위해 각종 광물을 갈아서 오일에 섞는 과정을 보면 숙연해지기까지 하더군요. 실내의 모습을 정확히 재현하기 위해 '카메라 옵스쿠라'라는 광학장치를 이용하여 원근법 등을 계산하는 것을 보면 마치 과학자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고요.
베르메르는 군청색을 무척 좋아했다고 하죠. 진주 귀걸이 소녀의 머리띠 색으로 사용된 것이 바로 군청색인데요. 저 색을 내기 위해서는 아프카니스탄에서 수입한 어떤 특수한 광물을 써야만 했답니다. 무척 비쌌다죠. 영화에서는 여인숙을 운영하며 궁색한 생활을 하던 베르메르가 정성들여 그 광물을 다루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치 서예가가 목욕제계하고 정성스런 마음으로 먹을 가는 그런 느낌이 들더군요.
부분그림으로 보면 또 다른 섬세한 맛이 느끼지시죠. 심지어 입술 부분은 관능적인 느낌마저 듭니다. '북구의 모나리자'라고 불리는 것이 이해됩니다.
일설에 의하면 베르메르의 작품들이 국외에서 전시되더라도 정부 차원에서 이 작품의 반출만은 금지시키고 있다는데요, 글쎄요,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좀 과장된 듯한 느낌이 드네요.
베르메르는 자신의 고향을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그리기도 했는데요. 아래의 [델프트 전경]은 베르메르 팬들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화라고까지 칭송받기도 합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시면 [델프트 풍경]의 일부분을 확대한 그림을 보실 수 있는데요. 구석구석 빛을 활용한 화가의 섬세함을 느낄 수 있으실 겁니다.
아래 그림은 감수성이 예민한 이들의 수필이나 여행기에서 자주 언급되는 [열린 창문 옆에서 편지를 읽고 있는 소녀 (Gril reading a letter at an open window)]입니다.
전 별로 궁금하지 않은데, 감수성 예민한 작가들은 저 소녀가 읽고 있는 편지의 내용과 저 소녀의 지금 심정이 참 궁금한가 봅디다. ^^
요즘 화가들은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서 시장에 내놓은 후 팔리길 기다립니다만, 베르메르가 살아있던 시기만 하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린다는 건 엄두를 내지 못했죠. 물감 등은 비싼데, 그림은 워낙 싸게 거래가 되고 있었답니다. 그러하니 배경이나 모델의 자세까지도 주문자가 원하는 대로 제작할 수 밖에 없었던 시절이죠. 중세시대와 차이가 있다면, 중세에는 교회나 귀족이 주고객이었고, 베르메르 시기에는 무역으로 재산을 모은 부유한 자본들이 주고객이었다는 정도지요. (이런 점을 감안하여 어떤 학자들은 '순수 미술이란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다소 과격한 주장을 펴기도 합니다.) 영화에 대한 제 기억이 맞다면, 어느 자본가가 저런 편지 읽는 소녀를 그려달라고 주문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저 소녀는 그냥 폼만 잡고 서있는 거겠죠. ^^
여하튼, 상업무역 전성기를 맞아 베르메르를 비롯한 풍속화가들이 기타 유럽지역과 다른, 네덜란드 특유의 화풍을 형성하게 됩니다. 실상 정물화가 유럽에서 유행하게 된 것도 네덜란드의 부유함과 관련이 있죠. 사실, 그림 자체만 놓고 보면 베르메르 이후의 화가들의 성취도가 훨씬 더 대단합니다.
특히, 제가 지금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네덜란드 화가는 '빛'뿐만 아니라 실내 가득 '안개'가 깔린 듯한 은은한 느낌을 더했고 더구나 서민들의 척박한 삶까지도 차분하게 그려내어서 감탄했던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그 화가가 기억나면 그림읽기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족) 쓰다보니, 저 역시 '편지 읽는 여인'의 심정을 궁금해했던 적이 있네요. ^^
작년 말 뉴욕 출장때 메트로 미술관에서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의 화보집을 구입했는데요. [Hotel Room]이란 제목으로 아래의 그림이 인쇄되어 있더군요. 마침 저도 그때 맨하탄 중심가 허름한 호텔 방에서 머물 때라 화보집에 실린 이 그림이 더 더욱 실감나서 그림 속 여인의 심정을 느껴보려 했던 기억이 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