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서적'과 <대학시절>
얼마 전 시골에 갔다가 작년에 나온 <시사인> 218호에 실린 “2011년 군내 불온서적 리스트”를 본 적이 있다. “장병 정신전력 강화에 부적합한 서적”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책들 가운데 ‘인상적’인 게 적지 않았지만 그 중 단연 압권은 <대학시절>! 그런데 <시사인>은 물론 <한겨레> <나꼼수> 등 이 일을 비판적으로(조롱도 섞어서) 다룬 그 어디에서도 이 책에 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으니, 독문학을 공부한 사람이 그만큼 적다는 말이겠지. 오늘, 마침 <한겨레>에 실린 한 사설(“진실로 불온한 재판부의 ‘불온서적’ 판결”)을 보다가 이 일이 생각나 한 자 적는다.
리스트는 ‘북한 찬양’ ‘반정부-반미’ ‘반자본주의’, 이렇게 세 항목으로 분류한 뒤 여기에 속하는 책들 42권을 적시하고 있는데, 제목이나 출판사, 지은이 등을 참으로 다각적으로 고려한 고심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1670
리스트를 보는 중에 돌연, 신은경이 쓴 책의 껍데기라도 구경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으니, 이 리스트가 ‘장병의 정신전력 강화’에 이바지할 뿐만 아니라 ‘민간인’에게는 독서욕을 적절하게 자극하는 역할도 하는 것 같다. 신은경이, 다른 곳도 아닌 조선일보사에서 낸 <사랑이 뭐길래 정치가 뭐길래>는 도대체 그 내용(또는 포장)이 뭐길래 ‘반자본주의’ 서적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린 걸까? 사실 이건 단순한 호기심이고, 진짜 인상적인 건 테오도르 슈토름의 <대학시절>이 ‘북한 찬양’에 해당하는 서적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것!
19세기 중반에 독일의 한 작가가 쓴 소품이 어떻게 하다가 21세기 한반도에서 북한을 찬양하는 서적으로 선정될 수 있었을까? 출판사나 저자, 책 제목과 내용을 내 나름 ‘다각적’으로 검토해봐도 쉽게 답이 나오질 않네.
작가는 '불온한' 사상이나 이념과는 거리가 먼, 이른바 ‘시적 리얼리즘’의 대표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인물인데다, 그 작품이라는 게 사회적 적대나 계급적 분노, '불온한' 선전-선동 따위와는 털끝만큼도 관계가 없지 않은가. 교학사라는 출판사도 '불온한' 출판사로 주목할 만한 곳은 아닌 것 같고.......
리스트를 이해하기 위해 궁리에 또 궁리를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리스트를 작성한 분들은, “장병”들이 이 책을 읽고 잠깐이나마 사랑의 우수에 빠지는 게, 고독과 쓸쓸함의 정조에 젖는 게 군 전력에 방해가 되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북한을 이롭게 한다고 판단한 게 아닐까? 아니면, 고전적인 문학작품도 하나 넣어 '북한 찬양'의 격을 높이려 한 것일까? 이도 아니라면, <대학시절>이라는 제목을 문제 삼은 게 아닐까? ‘대학’을 나오지 않은 “장병”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함으로써 군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판단!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이 리스트를 만든 분들의 섬세하고도 사려 깊음에 그저 탄복, 또 탄복하는 것 말고는 달리 어찌할 수 있는 게 없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리저리 집을 옮기는 중에 <대학시절>은 분실한 것 같으니, 혹시나 집이 털려도 내가 '불온서적 소지죄'에 걸릴 일은 없을 터라 일단은 안심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