異山

수원삼성 서포터즈와 ‘래디컬 시크’

海松 2010. 9. 15. 02:36

우리 애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축구와 ‘삼국지’(그리고 최근에는 ‘초한지’까지)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애가 꺼내는 말 대부분이 이것들과 관련된 것이고, 선수들과 장수들의 이름을 외우고 그들 간의 ‘등수’를 매기는 게 요즘의 주된 관심사다. 

그래서 얼마 전, 서울과 수원의 축구시합이 있다고 해서 애를 경기장에 데리고 갔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데도 경기장에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예약했던 사이드 관람석은 이미 만석이라 골대가 있는 쪽 관람석에 겨우 자리를 잡을 수 있었는데, 그것도 이층 윗자리라 선수들의 움직임은 가물가물. 안 그래도 축구시합 구경은 관심이 없는데, 거리까지 멀다보니 경기가 제대로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애는 같이 간 친구들과 열심히 구경하고, 나는 과자와 음료수를 조달하는 것으로 애비 역할을 다했다. 

그런데 우리가 앉은 곳이 수원팀의 응원단이 있는 곳 바로 윗 층이라 응원단(‘서포터즈’라고들 하는)이 응원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맨 앞에서 응원단 기수들이 흔들고 있는 깃발은 또렷하게 보였다.  

젊은이들이 깃발을 흔드는 곳은 이제 이런 곳뿐인가 하는 생각을 언뜻 하던 차에(‘촛불시위’ 때 깃발로 얼마나 말이 많았냐?), 깃발의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그 깃발에 새겨진 것은 *****가 아닌가. ***** 얼굴이 새겨진 깃발 두 개에 청백홍의 삼색기 하나를 흔들고 있었는데, 저건 또 뭘까 생각해보니 바로 프랑스 국기. ‘자유-평등-우애’를 상징하는 청-백-홍의 삼색기! 

프로축구 경기시합이 벌어지는 운동장에서, 그것도 ‘삼성’이라는 거대자본이 소유한 축구팀을 응원하는 ‘서포터즈’가 *****와 자유-평등-우애를 기리는 깃발을 흔들고 있다니..... 

가령 영국의 ‘맨유’처럼(맞나?) 전통적으로 노동자들이 많이 살았던 지역에 연고를 두고 있는 축구팀이라면 또 모를까, 아무런 지역적 특징도 없는, 지역의 전통(만약, 그런 게 있다면)과 아무런 유대감도 없는, *****는 물론이고 ‘자유-평등-우애’의 프랑스 혁명 정신과도 상극에 있을 ‘삼성’이 ‘소유’한 프로축구팀을 위해 저런 깃발을 흔들고 있는 저 젊은이들은 도대체 어떤 존재들일까, 저들의 머릿속에 *****와 혁명은 어떤 의미일까 하는 의문이 들더구먼. 

중간 휴식 시간에 핫팬티를 입은 ‘카라’가 나와서 춤을 출 때 열광하는 저 젊은이들이, 왜 ‘소녀시대’가 새겨진 깃발이나 이건희가 그려진 깃발 대신 *****를 흔들고 있는 것일까. 그들이 *****에서 무엇을 읽고, 무엇을 느끼며, 어떤 점을 숭앙하기에 허다한 인물들 중 하필이면 그를 깃발에 새겨 흔들어대는 것일까. 그 깃발에 새겨져 흔들리고 있는 *****는 무슨 생각을 할까........... 

이런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 ‘래디컬 시크’(Radical Chic)라는 말이 있더구먼. ‘강남좌파’라는 말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 같고........ 이런 이들을 부르는 적당한 말이 없을까 했는데, 마침 알라딘에 올라있는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을 읽다보니 ‘래디컬 시크’라는 말이 소개되어 있네. 

독일에서 지젝을 두고 ‘래디컬 시크’라고 빈정대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인데, 로쟈가 소개하고 있는 이 말의 뜻을 적어둔다. 

“이 말의 저작권자는 뉴욕의 저널리스트 톰 울프다. 1960년대 후반 미국 상류사회의 좌파 자유주의자가 블랙 팬더당(흑인 과격파) 기금 모집 파티를 열었을 때 그걸 비꼬는 의미로 처음 쓴 표현이라 한다. ‘한가한 부르주아지들과 아무런 의무감도 없이 반항이라는 몸짓으로 스릴을 즐기며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는 중산층 젊은이에 대한 조롱’을 담고 있다고. ‘반항의 이미지’를 과시하고 소비할 따름인데, 가장 비근한 예는 체 게바라의 얼굴이 인쇄된 티셔츠 같은 것이다.”(<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7>) 

미국에서 진작부터 이런 말이 쓰였다니, 이런 현상은 자본주의가 일정한 단계에 달하면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인 모양이네.  

*****의 전기가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었지. *****를 다룬 영화들도 있었고. 그런 책들, 그런 영화들 ‘덕분’에 *****가 삼성 축구팀을 응원하는 깃발에 새겨지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일 터.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자본주의의 놀라운 포용력. 자본주의세계체제에 맞서 싸운 삶도, 자본주의를 무너뜨리자고 주장하는 글과 영상들도 자본주의를 풍성하게 만드는데 쓰이는 이 곤경. 

이런 말이야 이제 너무 흔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지만, 이 흔한 이야기를 ‘내’가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나’에게 자본주의는 절대패권을 누리는 체제가 되고 말 터. 이런 ‘곤경’을 어떻게 봐야 하고,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 그대로 ‘숙고’가 필요한 것 같다. 많은 것들이 같이 걸려 있는 문제인데, 김수영의 잡문을 읽다보니 그 중 하나와 관련해서 생각할 만한 게 있네. 이 이야기도 다음에. 

[오늘의 퀴즈: *****에 들어갈 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