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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

두 미술평론가의 상반된 영화평 2. 반이정

김기덕 <피에타> 리뷰 (씨네21) 영 화 쪽 평 2012/10/16 13:19

 

http://blog.naver.com/dogstylist/40170321667

 

                                                                                                                    미술평론가 반이정

 

 

9월말 관람 직후 숙제를 떠안은 기분이었다고 짧게 밝힌(엮인글) 김기덕의 황금사자상 수상작 <피에타>에 관한 리뷰로 금주 <씨네21>(875호)에 실렸다. 관람 직후 기고를 작정했을 당시 생각은 미술계의 '올해의 작가상'에서 내가 4순위로 정한 작품과 나란히 묶어 예술상의 의미에 관해 쓰는 것이었다. 기고 매체를 정하지 않고(내심 매수 제한이 없는 한겨레 오피니언 사이트 Hook에 올리려고 했다), 일단 쓰기 시작했지만 서툰 초벌만 원고지 40매 가량이 나와서, 김기덕의 <피에타>만 독립해서 쓴 후 기왕이면 영화매체에 싣는 게 낫겠다 싶었다. <씨네21>의 '영화탐독' 코너의 분량(원고 매수 22매 제한)에 맞춰 탈고했는데 분량이 초과되어 책에는 일부 지문이 빠진 채 실렸다. <피에타>는 10월3일 공식 종영한 터라 다소 뒷북인 감이 있는 비평이지만. 내가 보낸 원제는 '황금 사자 부조리극. 탱자와 귤 사이, 기행과 천재 사이' 였는데, 책에는 '김기덕이라는 단순회로 -- <피에타>에 대한 과한 상찬이 불편한 이유는' 으로 바뀌어 실렸더라. 뭐 괜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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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이라는 단순 회로 -- <피에타>에 대한 과한 상찬이 불편한 이유는

 

수상 소식은 팽팽한 찬반 논란을 평정하는 확정 판결을 닮았다. '한국영화 최초의 황금사자상'은 한결 무거운 확정 판결일 거다. 데뷔 이래 감독이 자국 영화시장과 평단에서 일관되게 냉대를 받은 인물임을 감안할 때, 수상과 <피에타>를 대하는 지난 시절 비판자들의 해석이 필요할 터인데, 아직 조용한 걸 보면 판결의 효과는 지대한가보다. 감독과 소수의 추종 그룹은 권위 있는 우군을 얻은 심경일 것이다.

 

쟁점을 단순히 가져가자. 황금사자상은 김기덕의 영화미학에 대한 뒤늦은 승인과 본국의 (일부)혹평을 뒤집는 신뢰할 만한 반전일까? 김기덕의 영화세계와 <피에타>가 대체로 형편없다고 느낀 평자로서 나는 김기덕이 국외에서 유독 상찬 받는 원인을 대략 셋으로 본다.

 

하나. 언어 의존도가 높은 시간예술에서 대사가 차지하는 뉘앙스의 값이 실로 큰 법인데 번역(자막)은 본의 아니게 뉘앙스를 중화시킨다. 국외 심사는 구술 언어의 뉘앙스 값을 누락한 의미만 담은 자막으로 영화를 평가 한다. 그렇게 치면 한국인이 보는 외국영화의 경우도 같지 않을까. 물론 동일하다. 때문에 중화된 대사의 뉘앙스 값을 탕감할 독창적인 화면 구성, 탄탄한 플롯, 고유한 주제 설정이 평가를 보완할 것이다. 김기덕 영화도 그럴까?

 

둘. 국내에선 극단적 폭력, 빈약한 내용, 반여성적 주제 등이 김기덕에게 감점 요인이 되었지만, 이는 바다를 건너면 동 아시아적 신비주의나 이국적 영화 문법으로 곡해 수용될 소지가 높다. 그가 버릇처럼 화면 위로 소환하는 사찰과 불가의 도상도 본국에서는 낡은 동양적 코드이지만 바다를 건너면 여전히 각주를 달고픈 주변부 코드로 통할 것이다. 해외 시상식장에서 그가 부른 민요 아리랑이 해외 현지에선 심금을 울리기 쉬운 이국 취향인 것처럼.

 

셋. 평가는 오롯이 작품의 완성도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김기덕은 상대적으로 호감을 살만한 여러 이력을 갖춘 인물이다. 변방에서 인정 못 받는 저예산감독, 고등교육의 수혜를 입지 않고 성장한 입지전적 과거사, (자전영화 <아리랑>에 따르면)상업영화와의 불화로 유배당한 구도자 이미지까지. 김기덕은 작품 평가의 가산점으로 환산될 작품 밖의 마일리지를 충분히 쌓았다.

 

그동안 김기덕을 둘러싼 국내 평단의 비난은 도식 두엇으로 수렴되곤 했다. 대상화 된 여성과 주제의 마초성을 성토하는 여성주의 비평, 무분별한 폭력과 불편한 화면을 향한 질타. 일리 있는 지적들이지만 그를 향한 이 같은 비판의 도식은 비평의 확장성을 가로막았다. 더불어 김기덕을 둘러싼 찬반 양 진영 비평의 이론 과잉도 그의 영화세계를 부풀리는데 부득 일조한 측면이 크다. 빈약한 스토리를 잘게 토막 내어, 이론적으로 두둔하거나 논박하기 일쑤였으니. 과중한 이론으로 중무장한 두 진영 간 비평 싸움은 주제에 매달려 영화보다 윤리학으로 비화되곤 했고, 그들이 싸우고 떠난 자리는 그 누구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비문의 폐허로 남았다. 황금사자상 수상 직전 평론가 송효정은 김기덕 영화를 '행동하는 영화'로 규정한 후 "영화에서 욕망은 언어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바로 행동으로 외화" 되기에 "그의 영화를 인식으로 판단하는 것은 때로 공정치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씨네21 871호). 이쯤 되면 비평이 아니라 방언이나 주술에 가깝다. 인식으로 판단할 수 없는 작품이라면 어떤 경로로 평가받을 수 있을까? 나는 김기덕이 영화를 대체로 단순 회로 안에 완성한다고 보지만 설령 복잡 회로라 한들 그걸 인식 가능한 문장으로 수렴시키는 작업이 바로 비평이어야 한다.

 

'빈약한 기본기와 독보적 예술가상의 집착.' 김기덕을 평가 절하하는 원점을 나는 이렇게 파악한다. 김기덕 영화를 논쟁의 중심에 던졌던 반여성주의나 화면의 폭력성은 저 원점에서 파생된 예측 가능한 결과 중 일부였지 원점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므로 비평은 원점을 겨냥해야 한다.

 

천부적인 기행이 미학적 심도를 갖는 건 탄탄한 토대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기본기가 없는 기행이나 극단성은 울림을 주지 못한다. 김기덕의 영화는 감독이 확신하는 선명한 지향점과 그것을 향한 오롯한 자기 열정만 있다. 더 큰 불행은 감독 스스로 '타협하지 않는 맹목적인 자기 소신'을 전근대 미학의 잔재인 독보적인 예술가상으로 굳게 믿는 것 같다. 빈약한 기본기와 타협하지 않는 예술가상의 결합은 자연히 진부한 대사, 상투적인 연기, 선명한 선악 구도로 긴장감이 증발된 서사, 그리고 도식적인 상징들을 반복적으로 화면 위로 살포한다. 김기덕의 모국 언어와 정서를 공유하지 못하는 바다 건너 평자들이 이 모두를 반제도적인 전위 실험이나 동아시아의 주변부 미감으로 오독할 소지가 그래서 높다. 시간예술을 정확하게 판독하는 능력은 많은 경우 모국인에게 있다고 나는 본다.

 

<피에타>의 대사는 식상하다. "돈이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지."(가짜 엄마) "너는 돈으로 사람을 시험하는 악마야!"(채무자의 아내). 의미만 담긴 저 문어체 대사를 심지어 배우가 신파조의 표정 연기로 실어 나른다. 이런 구시대적 언어 감각마저 번역을 통해 여과되면서 구원 받을 게 아닌가. 인물 묘사도 대동소이하다. 극중 냉혈한의 캐릭터는 이글이글 불타는 눈매(연기인 게 너무 티가 나는), 시종 질러대는 문어체 고함, 판에 박힌 욕설의 반복으로 구현된다. 극중 인물의 희로애락을 초급 표현(고함, 욕설, 연극적 표정연기)에 묶어둔 김기덕의 연출은 상상력의 빈곤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마저 너무 과장되어 감정이입은 고사하고 허망한 웃음만 나온다.

 

빈약한 대사와 감정과잉의 연기로 구축한 플롯은 당초 고품질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야기 전개를 위해 준수해야 될 최소한의 개연성은 손쉽게 무시된다. 이는 김기덕이 지향하는 확정된 결론에 대사 연기 플롯을 모두 종속 시킨 결과가 빚은 참극이다. 치밀한 인과관계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현대의 관객이 이미 당도한 수준은 염두에 둬야하지 않을까? <피에타>의 플롯도 감독이 정한 명증한 결론 앞에서 극의 개연성이나 반전을 태연하게 무시한다. 우연의 일치라는 낡은 이야기 전개술도 남용된다. 엄마가 길 위에 방사하는 강도가 훔쳐온 토끼는 로드킬 당하고(내 이럴 줄 알았지), "자네 청계천을 하늘에서 내려다본 적이 있나?"라고 대사를 뱉고 옥상을 향하는 채무자는 추락사 하고(내 이럴 줄 알았지), 부모자식 관계를 아릿하게 진술하는 채무자에게 쉽게 동요된 강도는 손 절단을 포기하는(내 이럴 줄 알았지) 등 전후 맥락에 대한 세심히 추리 없이도, 전개될 다음 장면을 이내 추측할 수 있다. 선명한 결론에 대한 연출자의 강박이 가장 빈번이 쓰이고, 관객의 요구와도 부합되면서 용인되는 장르가 있긴 하다. 포르노그래피가 그렇다. 정사라는 선명한 목표 앞에 출장 나온 남자 배관공과 여자 집주인은 개연성은 아랑곳 않고 눈이 맞아 옷을 벗는다. 관객이 원하는 바와도 일치하니 문제 될 게 없다. 그런데 김기덕은 포르노그래피를 지향하지도 않고서도 동일한 플롯을 따른다. 연출자의 자기 확신이 지나쳐서다.

 

고대 소설의 잔재인 우연의 일치는 김기덕의 현대 극영화에서 또 오죽 빈번한가. 절름발이를 만든 채무자가 명동 나들이를 나온 강도와 가짜 엄마를 목격하거나, 이야기의 속개를 위해 가짜 엄마의 막무가내에 황망할 정도로 쉽게 동화되는 냉혈한 강도의 안이한 감정 관리 등등. 허구적인 우연의 일치가 눈감아줄 한계치를 초과하는 그의 영화는, 범인을 미리 알고 보는 추리극을 닮아 있다.

 

김기덕을 과대평가할 때 쓰이는 영화적 장치로 상징을 빼놓을 수 없겠다. <피에타>에도 교회 광고판과 불구가 된 채무자가 사찰에 기거하는 모습이 나온다. 김기덕의 다른 영화에서도 구원과 피안의 상징물로 곧잘 소환된 교회와 사찰은 실로 구태의연한 매개여서 상징의 탈을 썼으되 감독의 속내를 진술하는 직설이나 차라리 지시에 가깝다. 기성 영화 비평은 어째서 김기덕 영화의 대사 연기 플롯 그리고 상징 따위에서 빈번하게 발견되는 기본기 결여에 관대하고 급기야 비문에 가까운 비평언어로 과대 포장 할까? 애먼 영화 애호가가 이런 형국을 어떻게 수습하라고. 이 글을 쓴 이유다.

 

황금사자상은 김기덕의 위상과 입지를 예전과는 다른 반열에 올릴 게다. 그렇지만 향후 시나리오나 연출을 공동 분담하거나 현재 연출방식을 재고하지 않는 한, 나는 김기덕이 지금보다 사정이 더 나아지지 않으리라 내다본다. 유수의 국제 영화제들은 이 하드코어 이국 취향의 시네아스트를 여전히 초빙할 테고, 국내 영화시장과 평단은 여전히 그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면할 것 같다. 달라진 위상에도 변하지 않은 본국의 푸대접에 감독은 불평을 직설로 토해낼 테고, 그걸 언론이 '충격', '폭탄발언'같은 선정적 용어를 써서 받아 적을 것이다.

 

ps. "그런 객관적인 태도는 자화상뿐 아니라 뭔가를 만드는 사람의 기본이지 싶다. 자신이 만든 것을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보는 것이다. 자기 생각에만 빠져있다 보면 대단한 게 나오질 않는다." 대형 교통사고 직후 회생한 어느 일본인 감독의 에세이에 적힌 고백을 나는 더러 찾아서 읽는다. 김기덕이 자전 영화를 통해 (칩거의 본의에 반하는) 칩거의 내막을 낱낱이 공개한 걸 봐도 그의 인정욕구와 자의식 과잉은 남다르다. 이번 수상을 지난 피로에 대한 소박한 격려로 받아들이면 좋겠다. 자기 예술관에 대한 공인으로 믿는다면 이번 수상 자체가 황금 사자 부조리극이 될 수 있다.

 

반이정 : 어느 배우의 겸손한 수상 소감처럼 "수상은 우연의 요소가 많다."고 나도 평소 믿지만, 정반대 평가를 내린 작품의 수상은 비평가에게는 풀어야 할 과제다. 글을 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