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청춘에 바치는 송가6
-영등포역 연가
고향이 전남 벌교에
터 잡은 곳이 구로동이다 보니
수없이 영등포역에서 내렸다
맨 처음은 스무 살이었다
가방이 없어 종이 백 세 개에
잔뜩 옷가지가 담겨 있었다
스물셋 두 번째 상경 땐
큰 가방 하나에 작은 가방 두 개였다
십여 년이 흘러 다시 내릴 땐
한 여인과 갓 돌 지난
조그만 아이가 내 옆에 있었다
창피하다고 젊어서는 안 들고 가겠다 했지만
체면보다 생활이 먼저임을 깨달아갈 무렵엔
조기거나 양태거나 떡이 꽁꽁 얼려 있는
상자 두어 개를 낑낑거리며
들고 내려왔다 어떤 땐 잎 지는 가을이었고
어떤 땐 조용히 눈 내리는 겨울이었다
바람 불던 날
비 오던 날도 많았다
다시는 내려가지 않겠다고
이 악물던 날도 많았고
어떻게든 살아봐야 하지 않겠냐고
다시 발을 떼던 때도 많았다
아이도 다 크고
이제 내 곁엔 다시 아무도 없다
이 계단을 몇 번만 더 오르내리면
그것으로 그만일 수도 있다
거기 이십여 년째 줄 지어 잠들거나
소주병을 까고 있는 노숙인들이 남 같지 않다
그 틈 어디엔가
불쑥 끼어들어 눕고 싶을 때도 많았다
돌이킬 수 없지만
사는 것 그게 꼭 특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언젠가 사라질 것이며
다시 영등포역 계단을 오르내리는
한 소년이 한 청년이 한 사내가
한 노인이 있을 것이다
그에게 그들에게
부디 충만한 사랑과 행복만이 함께하기를
동네 도서관에서 이번에 나온 <문예중앙>을 넘기다보니 이 시가 눈에 들어왔다. 이 시를 쓴 송경동은 한때 우리에게 친숙했던 ‘삶의 시’를, 한때가 아니게 쓰고 있는 보기 드문 시인이다. 요즘 시와는 달리 쉽게 읽히는 탓도 있었겠지만, ‘산다’보다는 ‘이렇게 가는구나’ 쪽으로 기우는 요즘의 내 허허로운 심사가 이 시에 오래 머물게 했을 공산이 더 크다.
한때 밤차를 기다리며 서성대거나 아직 해 뜨지 않은 새벽에 빠져나왔던 서울역전의 그 누구도 20대의 이 시인보다 조금 더 추레했거나 조금 덜 추레했을 뿐 결국은 비슷한 행색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누군가에게는 그 한때 이후 벌써 3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 그가 살았던 삶도 결국은 이 시인이 그린 과정과 그리 많이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택배’ 덕분에 그림이 조금 바뀌긴 했겠지만 말이다.
그 누군가에게도, 앞으로 몇 년 더 기차역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내리는 일이 반복되겠지만 결국은 홀로 사라질 날이 올 것이다. 이미 그 전에 그 누군가도 “이제 내 곁엔 다시 아무도 없다”고 적게 될 것 같지만, 그렇게 홀로, 사라지는, 삶을 특별할 것 없이 받아들이면서 다시 그런 삶을 반복하는 이들에게 “부디 충만한 사랑과 행복만이 함께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그는 아직 갖추지 못했으니, 그래서 그 누군가는 가끔씩 헛된 우울과 허허로움에 시달리는 것일 터이다.
“한 소년이 한 청년이 한 사내가/ 한 노인이 있을 것이다”는 구절에서 문득, 최근에 다운 받아본 <은교>가 떠올랐다. 햇살처럼 투명하고 빛나는 젊음에 홀린, 이미 시들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자의 눈물로 끝나는 영화. 결국은 굴복할 수밖에 없는 늙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덜 늙은 영혼의, 더 늙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의 정조로 미만한 영화. 이와는 전혀 다른 자세를 한 이 시는, 이 시를 쓴 시인은, 이미 충분히 늙은 것일까 아직은 한참 젊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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