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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山

박인환: 목마와 숙녀

 

木馬와 淑女


    朴寅煥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生涯와

木馬를 타고 떠난 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木馬는 主人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少女는

庭園의 草木 옆에서 자라고

文學이 죽고 人生이 죽고

사랑의 眞理마저 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孤立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作別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未來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木馬 소리를 記憶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靑春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雜誌의 表紙처럼 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木馬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 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선시집> 195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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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뚱맞게 <목마와 숙녀>라니, 하고 생각들 하겠지. 지난 번에 말한 것처럼 간간이 김수영 산문집을 읽고 있는데(아직 조금밖에 못 읽었다), 朴寅煥(1926-1956)에 대한 말이 유별나게 튀는 것 같더라. 이미 죽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치고는 지나치게 공격적이라고나 할까. ‘정직함’이 김수영 雜文의 한 특징이긴 하지만, 박인환을 다룬 두 편의 잡문에서 드러나는 ‘거짓없음’은 노골적으로 공격적인데다 그 이상의 복잡한 심사를 싸안고 있는 것 같더만.

金利錫의 추도문에서는 附記에다 “혹시 고인을 욕되게나 하지 않았나 두려웁다.”는 말까지 조심스레 덧붙이는 김수영이, 박인환에 대해서만큼은 가혹하리만큼 신랄한 언사를 곳곳에서 구사하고 있는데,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이 그렇네.

“나는 寅煥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 그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몇 달 전에 썼던 <마리서사>에서 박인환에 대해 “욕을 쓴 것”이 마음에 걸려 다시 인환의 選詩集의 後記와 시들을 읽고 쓴 글(<朴寅煥>)의 첫 부분이다. 좋은 마음을 갖고자 억지로 그의 글과 시 들을 다시 읽어보았어도 김수영의 판단은 달라지지 않았던 모양. 그래서 벌컥 화를 낸다.

“인환! 너는 왜 이런, 신문기사만큼도 못한 것을 시라고 쓰고 갔다지? 이 유치한, 말발도 서지 않는 後記. 어떤 사람들은 너의 [木馬와 淑女]를 너의 가장 근사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 눈에는 <木馬>도 <淑女>도 낡은 말이다. 네가 이것을 쓰기 20년 전에 벌써 무수히 써먹은 낡은 말들이다. <園亭>이 다 뭐냐? <배코니아>가 다 뭣이며 <아뽀롱>이 다 뭐냐.”

얼마나 쌓인 게 많기에 죽은 사람을 두고 이런 식으로 말하나 싶기도 하다가, 이런 소리는 막역한 사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두 사람의 관계에는 뭔가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그 관계를 다룬 글들이 몇 편 있네.

그 중 한 편을 읽어보았는데, 거기서는 이들의 관계를 <아름다운, 혹은 ‘괴물 같은 짝패’>라고 하네. 여기서 <‘짝패’란 서로 욕망하면서 경쟁하고, 경쟁하면서 욕망하는 쌍둥이와 같은 관계>, <또 복사판처럼 이형동질의 관계로서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서로 원망(願望)함으로써 경쟁하는 관계이기에, 상대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이해자이기도 한 것>이라고 하고 있더만.

그런데, 이렇게 평가하려면 박인환에 대한 김수영의 태도뿐만 아니라 김수영에 대한 박인환의 태도도 논증의 근거로 동원되어야 하는데, 해방 후 갈라진 문단 '한 쪽'의 발랄한 리더로 행세했던 박인환의 눈에 과연 김수영이 그런 존재로 들어오기나 했을까 의심스러울뿐더러, 박인환 죽고 난 뒤 10년이나 지나 그에 관해 글을 쓴 김수영의 당시 상태 혹은 수준도 다소 일면적으로 이해하는 게 아닌가 싶네. 박인환을 다룬 김수영의 글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좀더 하기로 하고, 오늘은 [木馬와 淑女]를 올려놓는다. 술 좋아하는 누구와 가을 없는 곳에서 땀 흘릴 누구, ‘떠난다’는 말에 마음 아릴 누구, 또는 감성에 인색한 누구 등등이 가을 초엽의 풍경 속에서 잠깐이나마 ‘유치한’ 감상성에 젖는 여유를 갖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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