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가 중간경유지로 내게 보낸 책들을 훑어보는 중이다. 어제는 그 중 이글턴의 책 <반대자의 초상>에서 관심이 가는 몇몇 글을 골라 읽었다. 그리고 하루 뒤, 어제 읽었던 글 가운데 몇 편을 다시 읽었다. 거의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거의 처음 읽는 것 같은, 이런 상태. 공부하기에는 심각한 지경에 온 게 아닌가. 다른 수가 없다. 이제부터는 계속 적어놓는 수밖에.
이글턴의 책에서 인상적인 점? 대상의 핵심을 바로 움켜잡을 수 있는 지적 능력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을 풀어내는 글솜씨다. 내게 지젝의 재치는 같이 살짝 웃자니 따라잡기에 벅차 종종 건너뛰게 되는 잉여 혹은 과잉 들을 남기지만, 이글턴의 재치는 대부분의 대목에서 따라 웃을 수 있는, 그나마 감당할 만한 적정선의 언저리에 있는 어떤 것. 시간과 공간에 대한 사유들의 변화상을 빠른 속도로 스케치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은, 비록 그 중 상당부분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게 내 수준이지만, 그 수준에서 보더라도 탄복할 만하지 않는가. 급진주의자의 정신을 그린 것도 역시 소개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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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에서 모더니즘까지, 시간은 풍요로운 개념이었고 공간은 황폐한 개념이었다. 공간은 멈춰 있고, 비어 있고, 양쪽 귀 사이에 있는 무엇이거나 다리를 놓아 제거해야 할 무엇인 반면, 시간은(아니, 어쩌면 역사는) 움직이고, 싹을 틔우고, 열려 있는 것이었다. 새뮤얼 존슨이 변화 자체를 악으로 본 것과 꼭 같이, 베르톨트 브레히트 같은 모더니즘 작가는 변화 자체를 선으로 보았다. 구체화된 산물은 악이고, 역동하며 진화하는 과정은 선이라 했다. / 진부한 낭만주의의 흔적을 보이는 이런 사고는 필연적으로 도전받을 수밖에 없었다. 파스칼은 여전히 공간에서 사람을 뒤흔드는 장엄의 흔적을 느꼈지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진화를 멈추지 않는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그 체제가 느끼는 밀실공포증을 간파했다. 몇몇 모더니즘 예술가가 시간을 억류해 어지럽힌 뒤로, 포위당한 도시의 일부 수용자는 공간의 미덕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공간은 우리가 상대방에게 주어야 하는 무엇으로, 이제 예전과 달리 편평하지 않고 곡선적이며, 마음이나 행성 사이의 상호 압력을 바탕으로 구축되었다. 아인슈타인 이후, 공간은 예전에는 시간에 속하던 매력적인 성질을 새로 얻었다. 공간은 움직이고 이질적이고 다층적이며, 이제는 순전한 공허가 아니라 역동적인 힘으로서, 마치 유기체처럼 변화했다. 환경이라는 옷을 입은 공간은 양육과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우리 육체의 상호작용을 통해 개척된 공간은 유혹적인 성적 자극이 되었다. ‘정태stasis’ 개념은 더 매력적인 ‘구조’ 개념에 자리를 내주었고, 파스칼의 숭고 개념은 외부 우주에 뭔가가 있다는 유쾌하고 으스스한 감각으로 나타났다. 공간은 이제 가능성을 잉태했고, 지적 영역에서는 담론의 영토와 연구의 대륙을 논했다. ‘공간이 남는다’라는 말은 이제 더는 고갈과 동의어가 아니었다. ....... / 오늘날 공간은 시간을 그저 따라잡는 것을 넘어 오히려 앞장서서 끌어당기고 있다. 몇몇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너무 독특해서 이론화할 수 없는, 장소라는 형태를 띤 공간이, 개념의 트럼프 패에서 조커가 되어 추상을 거부하고 모든 거대 담론을 붕괴시킨다고 본다. 이제는 시간이 지루하게 균질적인 것, 매번 똑같은 지겨운 것이 되고, 속이 찬 자궁이라는 공간성에 대조되는, 남근적인 탄도가 된다. 그리고 공간이 시간에 그동안의 복수를 하느라 바쁜 와중에, 자연은 인간 역사에 자연의 권리를 행사해왔는데, 비관적 생태학자들은 그것을 이제 세상이라는 육신에서 종양이 자라는 이미지로 본다. 그러니, 경멸하듯 문화에 등을 돌리고 자연으로 향하는 모든 것이 문화로 수렴한다고 주장하는 양상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역설이다. 생태학과 문화 상대주의는 둘 다 인간의 보편적인 주권을 권좌에서 끌어내린다.”
“정신은 신비주의를 벗은 차가운 현실 감각을, 그것을 넘어서는 따뜻한 상상력의 도약에 얽어매면서, 직설법을 가정법과 결합해야 한다. 정신은 세상을 존중하는 동시에 거부해야 한다. 정신은 거울이면서 등불이 되어, 주변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동시에 주변의 모습을 바꾸는 빛을 발해야 한다. 환상으로 외도하는 것은 상황을 직시하는 데는 방해가 되지만 상황의 대안을 상상하는 데는 꼭 필요하다. 우리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행위에 생리적인 혐오감을 느끼게 되는 미래를 그려 보며 감동을 받는 한편으로, 현재의 감언이설 앞에서 무표정한 얼굴과 의심에 가득 찬 쌀쌀한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 낭만주의자가 세상을 자기들의 욕망에 순응시키는 사람들이라면, 현실주의자는 정신을 세계에 순응시키는 사람들이고, 혁명가는 이 둘을 동시에 다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 그런 의미에서 급진 정치학은 괴상한 혼성 인류, 즉 평균 인간보다 더 회의적이면서 동시에 더 믿음이 깊은 사람을 요구한다. ........ 급진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선지자라는 비난을 듣고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몽상적 유토피아주의자라는 비난을 들어야 비로소 제 길을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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