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말한 것은, 모두가 추정이고 가정이다. ‘현실’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고, 그렇게 진행되지 않은 바로 그 ‘현실’의 단면들을 편집한 것이 이 영화의 본론인 셈.
그 본론을 구성하고 있는 카메라의 시선은 대부분 송 교수 및 그를 데려온 단체들과 거기에 소속된 사람들의 모습에 맞추어져 있다. 그 사이사이 검찰과 언론의 모습이 잡히며, 보수단체들의 시위 장면도 간간이 등장한다.
이미 대부분의 영화관에서는 종영한 뒤, 이 영화를 둘러싼 논의들 중 인터넷을 통해 접할 수 있는 글 몇 편을 읽은 상태에서 영화를 보게 된 터라, 극장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나름의 ‘선입견’이 있었다. 마치 ‘우리 안의 파시즘’ 담론처럼, ‘우리 안의 국보법’ ‘우리 안의 이분법’을 드러냈을 거라는. 그것이---몇몇 사람들의 말처럼---얼마나 ‘충격적’인지 한 번 보자는 생각, 그리고 그런 각도에서 카메라는, 그래도 ‘이쪽 판’(?)에서는 제법 이름난 이들의 모습을 어떻게 찍어냈을까 하는, 일종의 관음증적 기대도 같이 있었을 터.
그래서인지, ‘충격’이라는 식으로 쓴 글들을 미리 읽고 봐서인지, 아니면, 내가 둔감한 탓인지, 송 교수를 둘러싸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그리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딱 세 사람의 발언과 행태만 돋보였을 뿐, 나머지 대부분의 ‘지식인’들의 태도는 ‘기대’ 이상으로 신중했으며, ‘기대’ 이상으로 같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중 정치학을 하는 박 모 교수의 반응이 특히 눈길을 끌었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송 교수 옆에 붙어 있는, 아마 송 교수와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가 아닐까 짐작되는 그 사람은, 가장 오랜 시간 카메라에 잡혔으면서도 말이 없다. 딱 한 마디, ‘아까 김 교수가 말한 것처럼, 송 교수, 네가 정말 바라는 게 뭐냐?’는 말 한 마디만 기억에 남는다(그 ‘김 교수’, 평소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 영화에서는 조금 달리 보이데^^). ‘정말 네가 바라는 게 뭐냐?’를 묻는. 나무라거나 강제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난감한 처지를 같이 고뇌하면서 친구의 바람을 어떻게든 받아들이고 싶은 안타까움이 배어있는 목소리이고 제스처로 보였다(‘그 송 교수’는 이에 대해서조차 갈피를 못 잡는 것 같고). 이와 같은 사람을 친구---실제로 친구인지 아닌지도 모르지만---로 둔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괜찮은 삶일 거라는 생각.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송 교수의 아내야말로 ‘동반자’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 같았다. 송 교수가 검찰조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 등을 쓰다듬어 주는 장면, 마치 엄마가 겁먹은 어린애를 안심시키는 것 같은.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송 교수 개인의 삶을 중심에 놓고, 그 시선에서 사태를 바라본 인물. 그녀의 발언은 큰 목소리들에 의해 ‘묵살’되었지만 생각을 끝까지 굽히지 않은. 이런 사람을 아내로 둔 것만으로도---실제 결혼생활이 어떨지는 모르지만--송 교수는 괜찮은 삶을 사는구나 싶은 마음.
곁다리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면, 검찰-언론의 수작. 유죄판결을 받은 범법자가 아니라 피의자의 신분임에도 피의 사실이 언론을 통해 마치 확증된 사실인양 흘러나가고, 그래서 재판도 받기 전에 이미 죄는 확정되는. 노무현 정권 초창기에 선보인---물론 이때만 그랬던 것은 아니겠지만---검찰-언론의 ‘공조체계’는 결국 노무현 본인의 죽음을 재촉했으니, ‘검찰-언론’이야말로 대한민국에서 ‘합법적’으로, 그것도 공공연하게 살인을 자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집단이 아닌지 하는 생각.
이제 본론인 대책위의 모습의 보자. 송 교수의 사정을 정확히 알 지 못한 채 그를 데려온 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전개되자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지 거듭 대책을 논의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들었던 세 가지 생각.
첫째, 고심에 찬 침통한 표정을 한 채 읽어나간 성명서에서 등장하는 “관용”이라는 말. 누구에게, 무엇에 대해 ‘관용’을 청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국민들에게’ 송 교수가 한 때 ‘빨갱이’였음에 대해 ‘관용’을 청하는 것인가?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반민주주의적 악법인 국보법의 폐기를 주창해왔을 것임에 틀림없는 그들이, 그 국보법을 위반한 송 교수에 대한 관용을 청하는 것? 스스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탓인지, ‘관용’에 말도 안 되는 수사들을 덧붙이는. 이게 아니라면, 송 교수가 ‘거짓말쟁이’였음에 대한 ‘관용’을 청한 것인지? 정작 본인은 양심에 따를 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함에도 말이다.
그래서 실제로 ‘관용’한 자들은 누구인가? 박홍 같은 인간이 보여주는 제스처. 마치 돌아온 탕아를 어루듯 하는. 이미 완전한 승자가 고개 숙인 죄인에게 죄를 사해주는 듯한. 그러면서 사울이 바울이 되듯 겉뿐만 아니라 속도 완전히 탈바꿈시키라는 격려까지. 참담하고 또 구역질나는 장면 중 하나.
그 탈바꿈, 그 회심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보수단체 회원인---영화가 끝나고 있었던 감독과의 대화에서, 이 두 사람이 재판에 빠짐없이 참석했던, 보수단체 소속의 사람들이는 소리를 들었다---두 사람(깍두기 머리의 ‘열혈남아’와 그 옆의 ‘냉혹한’ 같이 생긴)이 하는 말이 그것일 터. ‘전향’을 하려면 전향했다는 걸 몸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몇 놈을 불든지 해야 한다는 것. 요컨대 ‘빨갱이’ 색출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이라는 것. 이게 객석에서 ‘피식’ 소리를 나게 한 유일한 장면인데, 이들이 유별난 인간일까? 온갖 화려한 문구와 복잡한 논리로 분식된 조중동의 사설들, 교수라는 직함을 가진 이들이 거기에다 쓴 기고들이 하고 있는 말이 결국 같은 말 아니었던가. ‘거짓말쟁이’의 ‘반성’을 대하는 대다수 우리의 속마음 또한 그런 게 아닐까. 다만 그렇게 노골적이고 야만적이게, 단순-무식-과격하게 표현하는 것만은 삼가고 싶어할 뿐.
둘째, 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대응을 하게 됐을까? 대책위나 그와 관련된 사람들이 국보법 철폐를 주장했음에도 그들의 내면 속 깊은 곳은 국보법프레임 속에 갖혀 있었기 때문? 요컨대, ‘우리 안의 국보법’ 때문? 이건 아니지 않을까. 흥미로웠던 건, 송 교수한테 사과문을 발표하라고, 대한민국의 법질서를 따르겠다고 발표하라고 한 그들이, 송 교수가 그 법질서에 따라 구속되자 비로소 바로 그 법질서의 근간을 이루는 것 중 하나인 국보법을 철폐하라는 ‘운동’을---다시---활기차게 시도한다는 것. 송 교수 석방을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아마도 진심으로---운동을 전개했다는 것. 이런 그들에게 ‘우리 안의 국보법’을 이야기해봐야 아무런 설득력이 없을 것. 송두율 사건 ‘이전’이나 그의 구속 ‘이후’ 가장 열렬하게 국보법 철폐 운동을 한 사람들이 그들 아닌가. 그런데 바로 그들이 ‘사건의 한 가운데’에서는 왜 무기력한 대응밖에 할 수 없었을까. 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관에 봉착했다고 생각했을까.
셋째, 바로 그 노무 ‘운동’ 때문이 아닐까. 이어지는 글은 이 문제에 대해서. 기대하시라 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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