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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

고시원 1.

고시원 야간 총무 일을 하게 된 건 그야말로 필연이었다. (중략)  누가 고시원 총무 일을 해보면 어떠냐 말했을 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총무를 하면 방이 공짜다. 심지어 한 달에 20만 원에서 30만 원 가까운 수입이 생긴다. (중략) 내 주위에 이런 고부가가치 산업이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수소문한 지 이틀 만에 자리를 구했다. 문짝에 붙어 있던 구인 종이를 북 뜯어 손에 들고 원장실을 찾았다. 2층에 있었다. 단숨에 문을 열어젖히고 박력 있게 말했다.

 “진짜 잘할 수 있습니다. 저는 고시원 총무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고액 연봉을 위해서라면 발가락이라도 핥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렇게 일을 시작했다. 고시원을 옮겨 이사했다. 일은 쉬웠다. 오후 8시 30분 청소를 시작해 9시부터 자리를 잡는다. 방 보러 오는 학생들을 안내하고 월세를 받고 전화를 지키면서 새벽4시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그 시간 동안 대개 책을 보고 리포트를 쓰고 영화를 봤다. 나중에 잔뼈가 굵고 나선 3시가 되기 전에 그냥 잤다. 7시까지만 일어나 청소를 하면, 그걸로 야간 총무 업무의 모든 것이 마무리 되는 것이다. 그것 참 세상 되게 쉽고 편하다, 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조만간 쉽지 않게 되었다. 누군가 원장에게 내 근무 태도를 문제 삼은 모양이었다. 문을 잠그고 나가 보조 열쇠를 받으러 총무실에 내려갔더니 자리를 비우고 있더라, 는 내용이었다. 원장에게 한시간 가까운 정신교육을 받고 군기가 조금 들었다.

 그 뒤로는 원장이 총무실에 전화를 걸어오는 일이 부쩍 늘었다. 아침저녁 청소 상태 검사에도 날이 섰다. 이놈의 인생이란 뭔가 할 만하면 피곤해지는구나. 누군가 밤새 건물 건물 대문 앞에 싸놓은 한 무더기의 똥을 치우며, 아니 이것은 흡사 말이 싼 똥이 아닌가 싶어 갸웃거리며, 나는 신세를 원망했다.

 자정을 한 시간 남긴 때였다. 총무실에 앉아 미노루 후루야의 만화를 보고 있었다. 한참 키득거리며 재미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바람 소리인 줄 알았다. 다음에는 TV소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천장이 쿵쿵, 진동까지 느껴지는 바람에 저 위층에서 실시간으로 무언가 거대한 일이 진행 중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거 올라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데 그 와중에도 소리는 점점 커졌다. 남녀의 교성이 뒤섞여 흡사 무슨 동물의 울음소리마냥 벽을 타고 내려왔다. 짐승들. 아주 끝장을 보는구나. 대충 무슨 일인지 짐작이 되니, 올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가서 뭐라고 해야 되나. 하지마세요, 그래야 하나.

 별안간 총무실 앞 201호의 문이 열렸다...(중략) 좀체 말이 없는 201호 원생이 총무실 창문 바로 앞까지 다가와 나를 바라보고 섰다. 우리 눈이 마주쳤다. 원생이 오른손 집게 손가락으로 위층을 가리켰다. 그리고 표정을 있는 힘껏 잔뜩 찌푸렸다. 이제껏 그가 그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내는 광경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무척이나 놀랐다. 조금만 더 지체했다간 곰팡이 포자를 발사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났다. 얼른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306호였다. 내가 알기로는 어느 무역회사를 다니는 30대 초반의 여성이 기거하는 방이다. 302호에 사는 여대생이 문틈으로 얼굴을 빠끔히 내밀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안으로 쏙 사라져버렸다. 305호 문 앞까지 가 섰다. 아이고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이미 방 전체가 박살이라도 날 듯 진동하고 있었다.

 대개의 고시원이 그렇듯, 이 고시원의 방과 방 사이 벽이란 있으나마나 위장에 가까울 정도로 위태로운 것이었다. 합판보다 아주 조금 두꺼운 수준이라 해야 하나. 숨을 죽이고 일을 치러도 옆방에서 알아챌 텐데 이건 뭐 새해 첫 날 보신각 종 치듯 온 누리에 사랑을 알리고 있으니.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탄하고야 말았다.

 대단한 일이다. 인간의 교미가 이렇게까지 과감할 수 있단 말인가. 이들은 지금쯤 우주와 만나고 있는 게 아닐까. 자기야 저기 코스모가 보여. 코스모! 코스모! 이 정도라면 과연 숭고하다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나는 인간 욕망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실감하며 내심 숙연해진 채로 그냥 그렇게 가만히 서 있었다. 누가 뭐래도, 내게 코스모를 방해할 권한 따위는 없는 것이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문을 두드리고 말았다. 똑똑. 아차 싶었다. 들었을까. 용케도 알아챘는지 소리와 진동이 순식간에 멈추었다. 층 전체가 정적에 휩싸였다. 코스모는 사라졌다. 경외감도 사라졌다. 아니 이렇게 조용한 세상인데 말이야. 아, 저 총무인데요, 그, 조금만 조용히 해주시면 안 될까요. 다른 분들이 불평을 하셔서요.

 그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많이 좋니? 그렇게 좋아? 훌륭하십니다. 물어볼 수도 없고 칭찬할 수도 없고. 침묵이 이어졌다. 별 소리가 들리지 않아 나는 조금 기다리다 그냥 발길을 돌렸다. 어쨌든 조용해졌으니 곰팡이 형도 만족할 것이라 생각했다. (조금 중략)


 그러다 순식간에 소름이 확 돋았다. 너무 놀라서 앉은 자리에서 혼절할 뻔했다. 내 생전 그렇게 무서운 순간이 얼마나 있었던가 싶다. 계단과 계단 사이 꺾이는 구간에 웬 사람이 머리 하나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눈이 마주쳤지 싶었다. 이쪽을 바라보던 머리가 쏙 들어가 사라졌다. 그제야 상황을 알 만했다. 남자가 집에 가려는데 나랑 마주치기 미안했던지 무서웠던지 무안했던지 그런 모양이다. 아니 나는 당신을 존경한다고. 왜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거야.

 이윽고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되게 참하게 생긴, 군인이었다. 아, 군인이었구나. 왠지 듬직하다는 기분. 우리의 국방력. 우리의 코스모.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군인은 서두르고 있었다. 군화가 간신히 보이지 않을 정도의, 그것 참 대단히 미묘한 빠르기다. 도망가듯 도망가지 않는, 놀랍도록 애매한 속도였다. 곧 건물 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가 보았더니 계단에 검은색 가죽 장갑 하나가 나뒹굴고 있었다. 내게도 익숙한, 군에서 보급되는 가죽 장갑이다. 아이고 선생님 이걸 흘리고 가면 어떻게 합니까. 얼른 집어서 따라 내려갔다. 대문을 나섰다. 저 왼쪽 방향으로 군인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가 무슨 이유였는지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장갑을 들어 가져가라는 몸짓을 해보였다. 그런데 웬걸, 군인이 뛰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달리 너무나 빨랐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장갑 한 짝을 들고 거기 그냥 멍하니 섰다. 뭐랄까, 신화가 깨진 느낌이었다. 임춘애가 라면만 먹고 뛴 게 아니라 실은 계란도 풀어 먹었더라,는 고백을 들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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