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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

네스키오의 번역을 축하하는 그림 몇 점


이곳에서 산이형과 몇 번 대화를 나누다보니 내 기억력에 대한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했지. 간혹은 산이형의 기억이 확실히 틀렸다 싶은 것도 있지만, 산이형은 약간 천재끼가 있으므로 그런 기억력이 허물 없지만, 나같은 범부야 뭐 ..... 좌절감만 들지.

여하튼, 내 기억이 맞다면, 네스키오가 좋아했던 사진작가 중에 빔 밴더스가 있었어. 언젠가 네스키오 집에 놀러갔다가 그 사진집을 본 기억이 나. 그래서 빔 밴더스의 영화나 사진이 주는 이미지와 비슷한 그림 하나 올리려고. (빔 밴더스가 사진작가였었나...하고 네스키오가 놀래도 상관없고.... 내 기억력이 그렇지 뭐 !!!!)

여하튼, 최근 한국에서 휘트니 미술관 초청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는 인터넷 기사의 한 귀퉁이에, 에드워드 호퍼 (Edward Hopper, 1882~1967)의 그림도 한 점 있다는 소식이 실려 있더라구. 낯선 상황에 놓인 고독한 인간상을 즐겨 그린 호퍼의 국내 팬이 상당하다는 걸 익히 아는지라, 전시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기대가 컸으리라 싶어. 뭔 그림일까 조회해봤더니, 바로 이 그림이더만

 


<해질녘의 철로>라는 작품인데, 호퍼 특유의 인물화를 기대했던 관람객들은 십중팔구 실망했으리라 싶네.  전시회 다녀 온 사람들의 감상 후기를 얼른 훑어봐도 별다른 평이 없으니 말야.

구태여 이 작품에서 빔 밴더스를 연상하게 된 것은, 그네들의 작품에서 풍기는 묘한 "단절감" 때문이야. 호퍼는 철로가 나오는 그림을 대여섯 점 정도 그린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 (헉...또 기억이네)

아래에 퍼 온,  호퍼의 다른 철로 그림에서도 보이듯이,


호퍼의 그림 속 철로는 항상 그림을 상하로 또는 비스듬하게 확 갈라버리지. 철로 저 편 풍경속으로 다가가는 걸 막아버려. 그래서 그의 풍경화는 아늑하지 않고 건조하고 삭막해.

이창동의 영화 <박하 사탕>에서 설경구가 "나 돌아갈래"를 외치는 곳이 바로 철로 위라는 점에서도 상징되듯이, 일반적인 개념으로서의 철로는 대개 화면 저편으로 길게 이어지는 것으로 상상되지. 끝없이 이어지는 우리네 인생 여정을 아련하게 보여주려는 듯 하지.

그렇지만, 호퍼 그림 속 철로는 "목적지, 종착지... 우리 인생에는 뭐 그딴 거 없음" 하는 식으로 못박아버리는 듯 해. 좀 비정하고 암담하게 느껴지지.


빔 벤더스의 영화 <파리 텍사스>에서도 그런 "단절감"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한편에서만 보이도록 장치된 유리창이 두사람을 갈라버린 상태에서 대화를 나누는 오른쪽 장면과 비슷한 상황들 말이야.

내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보면서 저 장면에서 가장 짠~ 했던 기억이 나.

(나스타샤 킨스키가 저 유리창 너머에서 어떤(?) 장면을 연출하리라 기대했던 것이 어긋나서 짠~했던 거일수도 있겠지만...^^)

 










호퍼의 인물화에서는 특히 그런 단절감이 아주 잘 드러나는데, 예컨데 이런 그림들이지.



분명 풍경 속에 사람들은 존재하고 있지만, 그네들 사이에는 엄청난 장벽이 버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

이런 그림들을 보면 빔 벤더스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가 자연스럽게 떠 오르지.
영화 속 천사는 사람들을 속마음을 들을 수 있잖아. 사람들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천사가 듣는 그들의 속마음은 전혀 딴 생각으로 가득차 있지. 대화를 나누고 있되, 전혀 소통되지 않는 그런 단절감. 



네스키오가 좌충우돌 거쳐왔던 삶을 나름대로 생각해보면, 저런 이미지들이 많이 떠올라 그림 몇개 올려봤다. 나중에 그림 찾으면 몇 점 더 올린다는 말로 이 글을 마무리를 하려다가........


........... 기왕에 천사가 등장한 터라, 팁으로 파울 클레 (Paul Klee, 1879~1940)의 천사 그림 덧붙이지.

독일 제3제국 정권에 의해 "퇴폐 미술가"로 낙인 찍히기도 했던 파울 클레는 천사 그림을 자주 그렸어. 예컨데 아래와 같은 그림들이지.

 

 


천사들의 순진무구한 모습에 착안하여, 가끔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찬양하는 도구로 저 그림들을 활용하는 황당한 해프닝을 벌이기도 한다만.

어쨌든, 클레의 천사 그림들 중에서 특히 유명한 천사 그림은 <새로운 천사 (Angelus Novus)>라고 불리는 다음 그림이지.

 
벤야민과 관계된 워낙 유명한 그림이라, 벤야민을 공부하는 산이형 앞에서 그림 읽기가 좀 뭣하네. 산이 형이 추가 설명할 것을 전제로, 간단하게 언급만 하지. 

벤야민이 이 그림을 우연히 소장하게 된 이후로 가는 곳마다 책상 앞에 붙여놓고 항상 응시했다는 일화가 유명해. 혹자들은 이를 통해 벤야민 특유의 사유방식을 논하기도 해. 그림을 계속 주시하면서 사유를 펼쳐나가다가, 역시 그림을 보면서 파편화된 사유들을 하나의 결론으로 집결해가는 방식을 취했다고도 하지. 저 그림을 사유 전개의 출발점으로 삼는 동시에 사유 완성의 소실점으로 사용했다... 뭐 이런 식의 표현은 말이 되려나?

벤야민이 이 그림을 두고 썼던 글을 옮기는 정도로만 대신하며 글 마무리 할게. 나머진 산이형에게 떠 넘기고.
<역사철학 테제>에 나오는 글이라는데, 퍼오는 과정에서 누구의 번역본인지는 깜빡했네. 반성완이었던 것도 같은데, 여하튼 그것도 산이형이 알려주고 또 제대로 번역해 줄 거라고 믿고.

" 클레가 그린 새로운 천사 (Angelus Novus)라고 불리우는 그림이 하나 있다.

이 그림의 천사는, 마치 그가 응시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금방이라도 떨어지려고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묘사되어 있다. 그 천사는 눈을 크게 뜨고 있고, 그의 입은 열려 있으며 또 그의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도 바로 이렇게 보일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들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쉬임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을 바라보고 있다.

천사는, 머물러 있고 싶어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 일깨우고, 또 산산히 부서진 것들을 모아서 다시 결합시키고 싶어한다.

그러나 천국으로부터는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또 그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그의 날개를 더 이상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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