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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

'들뢰즈' 기념(?) 그림읽기

(요 앞글에서 들뢰즈가 거론되기에, 기념(?)으로 들뢰즈 식 그림 읽기 올려봅니다. 이전에 어디선가 옮겨 적어놓았던 글인데, 아쉽게도 누구의 글인지 기록해놓지 않았네요. 인터넷이 아닌 책이나 잡지를 보면서 베낀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마도 사진학과 교수나 미술학과 교수의 글이었지 싶네요. 베끼면서 내 임의로 첨삭했을 가능성도 있음을 감안해 주시고.....)

이론을 고치기보다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내는 것, 들뢰즈의 이러한 사유적 실천은 부정에 대한 진정한 긍정, 부정을 해방시키는 긍정으로 나아가는 철학의 고공비행이다. 그는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데카르트/칸트/헤겔/후설/하이데거/분석철학과 같은 철학, 그리고 스토아학파/스피노자/라이프니츠/니체/마르크스/베르그 송 등과 같은 철학 중에서 후자를 선택한 철학사가로 학문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철학사의 연구뿐만 아니라 프루스트, 카프카, 사드, 투르니에, 로렌스 등 문학가들에게도 주목하고, 서양의 미술사와 영화까지도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을 시도한다.

들뢰즈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개념이 갖는 폭력성에 대항하기 위해 니체가 말했던 감각적인 개념을 되살리고, 이를 통해 포착한 구체적인 것을 '특이성'이라 칭한다. 그리고 이 특이성은 고정된 개념의 틀을 벗어나는 계기라고 말한다. 이성적 동물로서의 사람이라는 규정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것이지만, 모든 사람들은 그 규정을 위반하고 거부하고 비껴가고 심지어는 전복시키려는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특이성을 사유한다는 것은 개념의 외부로 나가려는 지향을 내포하기 마련이다. 들뢰즈가 자신의 철학을 '사유의 무능력을 사유하는 일'이라고 부른 것은 이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실험을 특징으로 하는 들뢰즈의 철학 작업은 예술에서의 아방가르드와 상당히 닮아 있다. 그는 '앙티-오이디푸스'의 성공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후에도 계속해서 탐구영역을 바꾸어 가며 자신의 사유에 스스로 변이를 가했다. 정지되어 경직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그의 사유는 지배적인 기존의 철학에 대한 일종의 아방가르드적인 실험이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음 세기는 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푸코의 말은 '정확히' 틀린, 서로 아는 사이에 웃자고 한 말로 듣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들뢰즈의 세기란 영원히 개봉되지 않을 영화와 같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근대적 이성 자체를 '자본주의적 편집증'이라 진단하며, 이에 의해 유폐된 또 다른 인간적 속성의 복권을 시도한다. 수없이 다양한 가치체계를 하나의 위계질서로 단일화시키고자 한 것이 바로 근대적 이성의 역사라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근대적 이성의 변천과정을 영토화, 재영토화의 과정으로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는 방법론으로 탈영토화된 사고로의 전환을 제안한다. 세상의 중심은 하나가 아닌 다수이며, 따라서 서로 이질적인 것들은 이질적인 것으로서의 가치체계로 인정되어야 한다. 이것이 서로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여러 개의 다른 중심을 인정하는 분열증적인 자유분방함만이 하나의 중심을 고집하여 다양한 가치를 폭력적으로 지배하는 자기 동일적인 근대적 이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예술에 철학이나 과학과 동일한 범주의 지위를 부여한다. 철학이 개념의 존재들을 통한 변주들이고, 과학이 기능(함수)의 존재들을 통한 변수들이라면, 예술은 감각의 존재들을 통한 다양성들이 된다. 예술은 세계를 지각할 수 있는 가능성이며, 사유와 존재의 바탕 감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술을 통해 우리는 주체성, 견해, 선의지 너머의 비인간적 지대에 이르게 된다. 그것을 들뢰즈는 예술에 있어서 지각은 인간 이전의, 인간이 부재하는 풍경이라는 표현으로 말한다. 예술은 선의지를 지닌 견해의 상투적인 생각들을 넘어 카오스, 인간 이전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며, 그 속의 풍경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가능한 모든 시간적, 공간적, 객관적 규정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유기체적 전체성에 대립하는 파편적 비연속성의 드러냄을 예술의 주요 기능으로 보고 있다. 베이컨의 그림에 대한 구체적 분석은 아마도 이를 가장 적절하게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베이컨이 수행하는 형태의 해체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그가 해체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구별 가능함의 지대가 바로 동물과 인간 사이의 구별 불가능한 영역이라는 점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베이컨의 그림에서는 얼굴을 비롯하여 인격성의 징표가 될 만한 그 어떤 것도 드러나지 않는다. 베이컨의 그림이 구성하는 것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식별 불가능하고 구별 불가능한 영역인데, 이 영역이 바로 고기 덩어리이다. 고기 덩어리는 인간과 짐승 사이의 공통 영역임과 동시에 이 둘의 식별 불가능한 영역인데, 인간의 형태는 인격성을 상실하고 고기 덩어리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베이컨은 이 식별 불가능한 영역을 그림자 놀이를 통해 그의 그림에 드러낸다. 뚜렷한 형태가 없는 검은 얼룩으로 표현되는 모든 그림자는 그 주인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도살된 고기 덩어리처럼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데, 그림자만 보고는 그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림자의 익명성은 주인의 고유 명사성을 철저히 지워버린다. 1973년에 제작된 베이컨의 <삼면화>를 살펴보면 박쥐의 모습을 닮은 그림자는 인간의 그림자이면서도 더 이상 인간의 형태를 반영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림자는 인간 형태라는 껍데기 배후에 이제껏 숨겨져 있던 동물인지 인간인지 결정할 수 없는 그런 영역을 가시화해주는 것이다. 그림자는 우리가 감추어 두었던 어떤 동물처럼 몸으로부터 빠져나온다고 들뢰즈는 말한다.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인간 종과 동물 종의 구별에 의문을 제기하고 양자에 공통적인 고기 덩어리의 범주를 드러냄으로써 보다 직접적으로 인격성의 문제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이 베이컨의 그림에 대한 들뢰즈의 해석인 것이다.

주체의 개념으로부터 사유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들뢰즈에게 비인격적 익명성을 실현해주는 예술은 사유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는 혁명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고정된 체계를 거부했던 들뢰즈의 철학적 사유, 그러기에 그의 이름 앞에 하나의 이름표를 고정시키는 것은 영원히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인류의 문명은 오직 혁명적 생성에 달려 있다" (들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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